새로운 경험의 세기와 예측 불가능성의 미래-이진명, 큐레이터

새로운 경험의 세기와 예측 불가능성의 미래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굉장히 귀하고 드문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 어느 사회주의자의 영혼)[1]

 

Ⅰ.

스펙터클하며 장려(壯麗, magnificent)한 왕지원의 조각을 바라보자면 그 가시성(visibility)과 현란한 움직임에 일순 모든 판단이 정지된다. 그러나 이내 잠시 후 향유한 감각의 이면에 어떠한 의미가 내재되어있으며, 또 그 감각과 의미 사이의 맥락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지 고심하게 된다. 이 일차적 과제를 잠시 뒤로 하고 왕지원 작가 자체의 이미지로 돌아가본다.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본 것은 어느 그룹 전시회였다. 불교적 도상과 키네틱이 뒤섞인 현란함 자체였다. 그리고 왕지원 작가와의 만남은 올해 처음이었다. 일단 좋은 작가를 만나면 작가의 좋은 기운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렇지 않을 때 나는 격심한 우울에 빠지곤 한다. 왕지원 작가의 인상은 매우 좋았다. 선하고 진지하며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좋아할 것 같은 보기 드문 감수성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그 만남 이후로 더욱 진지하게 작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왕지원 예술을 대하는 세간의 해석은 주로 다음과 같다. 불교적 도상, 즉 불상의 형식을 차용해온 표면과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기계장치가 풍겨내는 사이보그 이미지를 결합해서 생각하는 관습적 해석이 대부분이다. 불교에서 질문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와 노버트 위이너(Norbert Wiener) 교수 이래의 사이버네틱스, 즉 인간의 뇌신경계를 육체로부터 추출하여 기계장치로 이식해서 영원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학문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해석의 방법이 대부분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의 궁극적 목표는 적멸(寂滅, nirvana)의 길이다.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아는 일이란 실로 불가능한 기획과도 같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그래서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은 끝끝내 찾아와주질 않는다. 다만 이 대질문의 여정에서 생로병사, 희로애락, 오욕칠정의 폭포수 같은 감정들이 뇌리에서 끊어진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 고뇌의 근원은 위에서 말한 감정들이며 이 감정들은 육체라는 물리적 조건 위에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두뇌 중추만을 영구적으로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적멸의 길은 수행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 수술로 보편화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 확실하지만 또 이것이 유토피아의 축복이 될지 디스토피아의 불온함이 될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메시지가 왕지원 예술에 대한 주된 단상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독은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주체와 대상, 자아와 타자, 남성과 여성, 백인종과 유색인종, 그레코로만 문명과 기타 문명이라는 이원론의 독단에 함몰된 사고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나로선 왕지원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그렇게만 읽을 수 없었다.

예술작품은 카를 만하임을 논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시대의 정황에 대한 적극적 반응이며 시대로부터 구속된다. 작가의 천수관음의 현란한 기계적 손놀림과 본존부처의 사유하는 시선의 흔들림이라는 코드는 절대 의심할 수 없었던 믿음의 가치마저 흔들리고 마는 현재의 현기증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그렇다고 작가는 현재의 불안에 대해서만 형상화한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Ⅱ.

불교의 나한상(羅漢像)은 가섭존자나 아난존자와 같은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교적 관행이고, 훌륭함의 근거란 깨달음의 유무일 것이며, 또 깨달음이란 현세에서 내향적 초월을 성취했는가 아닌가의 여부일 것이다. 이 극도의 정신적 상징에 서구의 도구적 이성을 상기시키는 사이보그가 왕지원의 작품 속에서 양립하고 있다.

20세기를 넘기고 신세기를 달려가는 지금 이성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갔다고 흔히들 말한다. 무언가 좌표를 잃은 이 상실의 시대에서 사람다운 삶의 근거였던 보편주의적 믿음과 도덕의 원칙을 지원해줄 형이상학적 기초는 예전에 무너졌다. 이러한 사실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유명한 한 문장으로 알 수 있다. 근대정신은 신(神)을 이성으로 대체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서양 문명의 기반이 된 근대이성과 이에 연관되어 발전된 자본주의 삶의 양식은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제노사이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예술이 문명의 꽃이라고 할 때 이러한 파괴의 문명에서 피어난 예술은 과연 온당하단 말인가?

1945년부터 1970년대 비교적 안온했던 초반기의 자본주의를 낸시 프레이저와 같은 학자는 케인스-베스트팔렌주의적 틀(Keynesian-Westphalian frame)이라고 말한다.[2] 그녀가 중점적으로 검토한 이 시기의 키워드로는 경제 지상주의(economism), 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 국가 사회주의(ètaism), 베스트팔렌주의(westphalianism)가 있다. 국가가 나서서 자국의 경제를 보호한다는 케인스주의, 또 한 국가의 국경 내에서의 사회 시스템을 서로 인정한다는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이 이 시기의 주요 패러다임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침범하지 않고 자기 영역을 지키는 모더니즘 예술의 시스템과도 닮았다. 이 틀은 1980년대 이후 급격히 심화되어 이질화되었다. 국제주의, 무한 경쟁주의, 글로벌리즘, 노마디즘과 같이 국경과 국가를 초월한 가치들이 일상화되었으며, 예술에서는 모더니즘을 뒤엎는 새로운 형식이 창출되었다. 21세기를 넘어선 현재 시점은 그야말로 시계(視界) 제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분열과 불안의 시대이다. 비판적 이성은 간데 없고 도구적 이성을 통한 과학기술은 진보하는데 인간주의가 안착할 수 있는 근간인 도덕적 원칙은 점점 허물어지다 실종되었다. 예술에서도 가치 추구보다 상업적 전략만이 득세를 이룬다.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자세야말로 미덕이 되기까지 했다. 정신은 실종되고 물질이 난무하는 모습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작가의 불교적 도상과 사이보그 형상의 일원화는 성속구유(聖俗具有), 자웅동체의 안드로기노스를 연상시킨다. 문제는 가섭존자의 깨우침의 표정을 사이보그의 동력에 종속시키는 작가의 선택이다. 이는 고도의 정신성이 더욱 내면화되는 물질성에 굴복하고 마는 현시대의 난국(impasse)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어떤 절박한 목표지향적 자기 의식이 상실된 현재를 가리킨다. 이 ‘난국’은 어느 정도 ‘결정’된 것 같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에는 또 다른 전략이 숨어있다. 작가는 아이덴티티의 규정을 회피하면서 오히려 열린 해석의 다양성을 발생시킨다.

 

Ⅲ.

왕지원 예술에 등장하는 21세기형 조각에서 정확한 아이덴티티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아이덴티티는 결정론을 뜻한다. 결정론은 예정된 운명을 믿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은 자기의 결정화된 운명을 체념하는 것이다. 왕지원의 예술은 규정할 수 없기에 오히려 희망이 있다. 안티고네는 자기의 운명을 순응하며 자기에게 몰려오는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안티고네는 운명의 결정론에서 나약한 심성을 보여주었다. 반면 결정된 재앙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해결을 모색한 사람은 아리아드네였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결정된 아이덴티티를 신뢰하라고 권고하기보다 운명 자체를 변화무쌍한 모험으로 초대한다. 실타래는 환희와 행복보다 배신과 좌절,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 실타래는 아리아드네로 하여금 미노스 섬에서 낙소스 섬까지 이동시켰고 사랑을 배신감으로 바꿔놓았지만, 결국 테세우스의 근육보다 좋은 디오니소스의 열정을 가져다 주었다. 삶은 영원히 알 수가 없는 것이고 무엇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규정하고 재단할 필요가 없다.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비정형성은 우리에게 긴박하고 요긴한 삶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왕지원 작가의 작품세계는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를 구현하고 있다. 자기 삶의 앞날을 경쾌하고 열린 태도로 맞이하는 것, 끝없는 긍정, 사랑스러운 지혜야말로 우리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왕지원은 초월적 경험에 대한 가능성이 상실된 분위기와 극단적 이성이 갈 수 있는 종국의 분위기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사로잡히는 사고는 위험하다고 발언한다. 오히려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의 위대성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을 긍정하는 순간, 어느새 난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실타래가 주어지는 것,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설레는 것, 이러한 태도야말로 단순히 존재하지 않고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기로부터 출발한 실험에서 영역이 차츰 넓어져서 나한과 천수관음, 본존부처로 차츰 확산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어디로 갈지, 즉 작품세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작가의 세계가 멋진 이유는 자기를 결정 지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끝없는 삶의 실험과 모험을 감행할 따름이기에 작가의 앞날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의 예술관은 라비린토스라는 세상의 수수께끼를 오가는 실타래이기 때문이다.

 

이진명, 큐레이터

 

[1] Alvin Redman, The Wit of Humor of Oscar Wilde, Dover, 1952, 65p. “To live is the rarest thing in the world. Most people exist, that is all.”

[2] Nancy Fraser, Feminism, Capitalism and The Cunning of History, New Left Review 56, pp. 10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