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적 역설을 통한 성찰-임성훈(Ph.D.)

조형적 역설을 통한 성찰

임성훈(미학)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사물의 본질은 이데아의 형상(eidos)에 있다고 주장한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이란 이데아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물 그 자체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예술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물에 대한 재현은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한 측면을 보여줄 수 있기에 우리를 사유로 인도하고, 또 이로 인해 쾌감을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정을 그는 ‘시학’에서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놓았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라는 예를 들어 설명한다. 실상 동물이나 사람의 시체를 길거리에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흉한 모습에 놀라 제대로 살피거나 생각할 틈도 없이 달아나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재현된 그림에서는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그림에 재현된 시체를 보고 놀라 주춤거린다거나 불쾌감 때문에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보고 우리의 몸 그리고 나아가 삶과 일상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왕지원의 작업과 작품을 논하기에 앞서, 다소 장황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을 언급한 이유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작품들은 그 자신을 재현한 결과물이다. 물론 이를 두고 ‘작가의 분신이 표현되었다’라는 식으로 오해한다면 곤란한 일이다. 왜냐하면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레탄, 금속 재료, CPU 보드, 모터 등과 같은 기계적 장치로 조합된 형태는 곧 작가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도 이후 작품의 양상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자신을 재현하는 작업을 멈춘 적은 없었다. 몇 년 전 성보갤러리의 전시에서는 아예 자신의 신체 크기와 같은 작품 <Z>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Z>가 걸친 옷도 작가가 늘 입고 다니던 것이었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자신을 기계적 조형성으로 재현하려는 모티브가 무엇인지를 작가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어릴 때 허약하고 아팠던 적이 많았기에 완전한 몸을 상상하곤 했고, 그것이 지금의 작업 모티브가 되었다고 말했었다. 강인하고 완전한 몸에 대한 동경은 먼 훗날 기계로 재현된 작품에서 다시 각인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완전성(기계)과 불완전성()에 대한 성찰이 자리 잡고 있다.

실상 왕지원의 작업은 영원한 몸, 완전한 몸을 기계로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기계의 몸이란 단지 자기 본질을 인식하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덧없고 불완전한 인간을 만난다. 불완전하고, 기계에 의해 조종당할 수 있는 몸, 그것이 인간의 몸이다. 그렇지만 몸의 불완전성이 기계의 완전성에 수동적으로 제압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넘어서기도 한다. 사라지는 몸, 그리고 덧없음에 대한 애환의 흔적이 남겨진 몸, 그 몸은 불완전하기에 역설적으로 완전하다. 그러니까 몸의 완전성은 역설적으로 불완전성 속에 존재한다. 작가는 이를 조형적 역설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또한 그것을 미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예컨대, 센스 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적 몸의 동작은 완전성이 아니라 오히려 몸의 불완전성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조형적 역설을 통한 성찰은 부다(Buddha)의 형상에서 극대화된다. 왕지원의 작품을 단순히 키네틱 조각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혹은 기계 미학의 조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기 힘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몇 년간 작가는 조형적 역설을 통해 성찰하는 작업을 해왔고, 또 이로 인해 주목을 받아왔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궁금하다. 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이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의 작업이 시작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오롯이 작가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최근작들을 보면, 이미 어떤 조형적 전환점이 모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전환점이 마련되든지 간에 조형적 역설을 통한 성찰은 지속될 것이다. 감각성에 빠져들지 않고, 조형적 긴장감을 견인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성찰의 힘이 근저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