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지원 론(論)
김노암(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
왕지원의 작품은 성(聖)과 속(俗)의 관계와 운동을 은유한다. 비요크(Bjork Guomundsdottir)의 뮤직비디오에 나온 기이한 에로티시즘의 안드로이드 또는 위에민준(岳敏君)의 웃는 인물처럼 왕지원의 인물이 반복되며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위엔민준이 작기 자신의 자화상이라면 왕지원의 인물은 자화상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막연한 표상으로서의 초상이다. 그 인물은 다소 뚱한 표정이며 뭔가 마뜩치 않은 표정이다. 이 인물은 천수관음과 같은 보살이나 부처의 이미지를 모방하면서 천천히 운동을 반복한다. 종교적 표상을 재현하면서도 이웃집 아저씨나 총각을 닮은 얼굴의 어색한 결합. 사람의 얼굴은 본래 형이상학적이다. 존재론적이기에 실존의 문제와 맞닿는다. 조형적 특징뿐만 아니라 그것이 은유하는 문제들 또한 개인적 취향의 영역을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의 자기 정체성과 같은 실체의 문제 등 어렵고 골치 아픈 것들이다.
몇 년 전 해인아트프로젝트에 초대된 작가의 작품을 보고 불교 신도들이 예불을 드렸다는 일화는 왕지원 작가의 작업이 일반적인 미술사의 맥락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객의 종교적 운동을 낳으니 말이다. 마치 현대미술이라는 그릇에 원형적인 종교성을 부여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 곧 미술의 역사였다면, 역설적으로 현대미술로 종교의 문제와 접촉한다는 점은 명상과 영적체험, 인신공양과 까르마의 문제, 종교와 예술의 경계문제 등 작가의 작업의 이해와 해석의 문제를 훨씬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왕지원의 작업은 일반적인 키네틱아트와 관련된 시각이나 문제선상에서 비껴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영성(靈性)을 다룬다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그동안의 그가 참여했던 전시들의 기획방향이나 맥락을 보면 여전히 미술사적 맥락에 충실한 또는 세속적 정서와 관련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기계적 운동이 주는 쾌감과는 동떨어져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계적 장치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면서도 인물의 표정을 보면 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인상을 견인하기 때문이다. 매우 정교하면서도 깔끔한 조형적 특징과 섬세한 키네틱아트의 운동성과 매우 이질적인 인물의 인상의 결합을 통해 왕지원의 작업은 그의 사적인 내러티브는 물론 평균적인 사람들이 인생을 통해 감내해야할 어떤 고통(苦)이나 불편하고 불안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모순이나 딜레마를 떠올린다.